폭싹 속았수다: 그림할망 퍼포먼스
- drawingm
- 4월 1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11일
제주공항, 오전 비행기. 그림할망이 육지로 나서는 길이다.
손에는 트렁크, 머리엔 손수 만든 패랭이, 목에는 자신의 그림이 프린트된 야광빛 스카프를 둘렀다.
공항의 사람들은 조용히 시선을 보낸다. 그건 단지 복장이 특이해서가 아니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막 시작되려는 느리지만 신중한 서사의 입구였기 때문이다.
할망에게 육지행은 그림과 몸과 삶을 들고 가는 예술의 모험이다.
표를 끊고, 수하물을 부치고, 검색대를 지나며 그녀는 침묵한 채로 하나하나 통과한다.
말 대신 옷이, 걸음이, 눈빛과 표정이 대답한다.
이건 혼자만의 모험이 아니다. 트렁크 안에는 다른 할망들의 그림도 실려 있고, 그림에는 <폭싹속았수다>에 신이 깃든 순간들과 제주의 색이 스며 있다.
그림할망이 공항을 통과하는 순간, 그녀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전령이 된다.
육지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약간의 긴장을 동반한다.
꽃샘추위에 대비해 큼지막한 스웨터를 겹쳐 입고, 모자의 각도를 한 번 더 만져본다.
그림할망은 그렇게, 몸으로 이야기를 짓는 사람처럼, 자신을 입고, 자신의 세계를 짊어진 채,
비행기에 오른다.
그림할망은 혼자가 아니다. 그녀는 늘 공동체와 함께 출현한다.
함께 그림을 그리고, 함께 흙을 일구고, 함께 천을 나누고, 감각을 박는 사람들. 공항 한편, 그들은 서로의 짐을 도우며 비행기 이륙을 기다린다. 그 모습은 마치 여행이 아니라 작은 제례나 출항 의식처럼 느껴진다.
그림할망 공동체는 농사의 리듬으로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비 오는 날엔 붓을 들고, 해가 쨍하면 챙이 큰 패랭이를 눌러 쓴다. 24절기 따라 그려온 삶. 그 성실한 삶의 몸짓이 지금, 공항 한가운데서 예술의 출현으로 바뀌고 있다.
누구도 같은 옷을 입지 않았지만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패션이 그림이다. 자신만의 패랭이, 스카프, 두 겹, 세 겹의 옷.
그들은 지금, 자기만의 패션으로 이륙을 준비하는 중이다.
트렁크엔 그림이, 몸엔 작업복과 무대복이 뒤섞여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고, 할망은 미소로 화답한다.
그건 단순한 ‘등장’이 아니었다. 출현이었다.
출현은 단지 공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출현은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는 개입이고, 자신의 존재를 감각과 움직임으로 말하는 방식이다. 그림할망들은 등장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살아온 방식대로 입고, 들고, 움직인다. 그것이 그대로 예술이 된다.
햇살이 쏟아지는 장소에서 신나는 할망은 모자를 눌러쓴다. 햇빛을 이겨내는 농부의 지혜. 그리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스카프—그 위엔 자신의 그림 <아이가 어떵 누워신고, 신이 와신가>가 인쇄되어 있다.
그녀는 종이피리를 꺼낸다. 반짝이는 술이 햇빛을 튕기고, 입술은 살짝 오무려진다. 숨을 꾹 참았다가—
뿌~~~~!
그녀가 피리를 불면, 다들 일어선다. 그 소리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진다.
그건 신호이자 북소리, 공동체의 나팔이다.
그녀는 모자 하나, 스카프 하나, 피리 하나로 말한다.
그건 삶의 의상이고, 예술의 도구이며, 세상에 보내는 메시지다.
오가자. 신나는 할망이 앞장서면, 그 사랑스런 재치에 신이 난다.
다른 할망은 주름치마에 실밥을 고른다. 주황은 겉에, 바랜 분홍은 안에. 천을 이어 붙이고, 주름을 잡아 그 천을 패랭이에 덧댄 모습이 농부화가 패션의 상징이다. 모자에 덛댄 천은 바스락. 스웨터는 몽골 몽골한 촉감으로 손을 비비고 싶어진다. 그 질감의소리도 할망의 언어다.
“패랭이 사다가, 더우니까 그늘 할라고 위에 천 씌운 건데.
천이 없으니 집에 있는 거로, 미싱으로 박아서, 이래저래 만든 거.”
이래저래. 그 말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즉흥처럼 보이지만 섬세하고, 불균형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조화로운 감각.
그건 어떤 이론보다 더 정밀한 미학이다. 삶의 감각이 만든 구조, 감정이 입힌 옷. 그리고 그것은 소리 없이, 태도로 말한다.
패션 심리학은 말한다. 우리가 입는 것은 감정의 표현이며, 때로는 자기확언(self-affirmation)의 도구라고. 할망은 스스로를 감싸고, 자신을 들고 나온다. 그림을, 천을, 피리를 통해.
-최소연 (미술가,예술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