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망패션은 그림이다.
- drawingm
- 3월 30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4월 11일
걷는 회화, 공항의 패션 – 그림할망이라는 공동체적 퍼포먼스
그림할망의 공항패션은 퍼포먼스다. 단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르고 신화를 걷는 일이다. 손뜨개한 스웨터, 그림을 넣은 스카프, 손때가 묻어 길이 든 핸드백의 매무새까지—그녀의 옷차림은 회화이자 서사이며, 존재 그 자체의 제의다.
십 년 만에, 혹은 삼십 년 만에 육지로 떠나는 길. 그림할망은 느린 걸음으로 공항을 걷는다. 그 발끝엔 섬의 기억이 실려 있고, 그녀가 쥔 지팡이에서는 그림 작업장의 냄새가 따라온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그녀의 걸음과 몸짓, 바람에 펄럭이는 천의 리듬이야말로 시간과 기억을 움직이는 ‘걷는 회화’라는 것을. 그녀는 붓 대신 천을 들고, 캔버스 대신 자신의 몸을 입는다. 공항이라는 무대 위에서 그림할망은 오늘도 예술이 된다.
여신들의 세계관이 저마다 독립적이면서도 서로의 신화에 영향을 주듯, 그림할망들 또한 각자의 고유한 삶과 미감, 기억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고유성은 옷차림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으라차차 조수용할망(96세)은 작고 민첩한 패션으로 단연 눈에 띈다. 햇빛에 예쁘게 바랜 연보라빛 점퍼를 걸치고, 쌍가락지를 낀 손에는 오래된 검정 핸드백이 들려 있다. 목에는 짧은 손수건을 둘렀고, 발끝에는 파란 줄무늬 양말이 위트 있게 배치되어 있다. 그의 스타일은 분명하며, 움직임과 마찬가지로 작지만 경쾌하다.
소막할망 강희선(89세)은 자신의 그림을 스카프로 만들어 둘렀다. 늘 쓰던 밀짚 모자와 큼지막한 아이보리빛 스웨터로 굽은 허리를 감추고, 두겹으로 두른 아이보리빛 진주팔찌까지, 그녀에겐 모두가 패션이다.
무화과 할망 박인수는 '폭싹 속았수다' 속 애순이의 도트 스카프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땡땡이 스카프를 잊지 않는다. 제주에서 탈출해 부산으로 가출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은 그녀의 패션 안에 조용히 숨 쉬고 있다.

초록할망 홍태옥(89세)은 오랜만에 꺼내 든 핸드백 안에 애순이가 기르고 관식이가 팔아주던 양배추를 담았다. 작가가 다시 <양배추연작> 시리즈그림으로 길러낸 양배추가 공항을 이동하는 순간이다.
고목낭할망 김인자(85세)의 패션은 단연 독보적이다. 고목을 상징하는 브라운 퍼 조끼에 나비 브로치, 해바라기, 머리 위엔 탁 얹은 선글라스. 최근작 <해바라기 활싹 피었다>를 패션으로 재현한 이 스타일은 그림할망이 자신의 예술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살아내는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호피무늬 스카프와 물감과 붓이 든 짙은 분홍색 핸드백까지 더해져, 어디서든 남의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을 그릴 기세다. 그녀는 스스로가 "그림할망"임을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과시한다.
그들의 스타일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기억이고 태도이며, 회화의 연장선이다. 그림을 그리고, 입고, 살아내는 사람들. 서로의 스타일을 흘끗 바라보며, 가끔은 질투하고, 지꺼진 웃음으로 응원한다.
그 감정들은 숨기지 않는다. 그저 제주어로 자연스럽게, 느슨하게 얽혀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녀들의 패션은 질투와 응원이 공존하는 관계의 회화이다.
할망패션은 그림이다. 그 안에는 과거와 현재, 기막힌 신들이 된 할망들의 정체성과 취향, 그리고 서로를 향한 다정한 시선이 촘촘히 박음질되어 있다. 그림할망의 패션은 더 이상 섬에 머물지 않는다. 할망들의 독립적인 스타일과 미감은 언젠가 청춘들에게도 영감을 줄 것이다. 할망패션이 불러올 조용한 레트로 열풍, 그것은 곧 그림할망의 자존심이다.
이주 전에 육지로 먼저 떠난 건 그림할망들의 최신작이다. 그리고 오늘, 그 작품을 따라 넷플릭스 팝업 <폭싹 속았수다 – 그림할망 전시회>의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은 그림할망 자신이다.
한 벌의 옷으로 시간을 입고, 한 줄의 다정한 미소로 존재를 증명하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 길. 그녀들은 예술이다. 느리게 함께 걷고, 지꺼지게 웃고, 마음냥 살아 있는 움직이는 회화이다.
그리고, 오롯이 오늘을 함께 살아낸다.
우리는 그림할망이주. 붓질은 호끔 늦었어도, 삶은 먼저 그려봤수다.
-최소연 (미술가, 예술감독)